네모난 우물

하얀성-오르한 파묵

오늘 새벽 꿈을 꾸었다.

내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에 쉐도잉을 하고 보니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네모난 얼굴에 턱 주변으로 수염이 자라 있었다.

끝이 뭉툭한게 며칠전 면도를 한 단면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나가지?'

'면도는 어떻게 하는 거지?'

걱정을 하다가 알람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어젯밤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을 읽었다.

담쟁이 덩굴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우리들은 신이 났다.
잘 그린 그림은 교실 뒤 게시판에다 붙여 놓는다는
선생님 말씀에
우리들은 싱글벙글 그림을 그렸다.

미술 시간이 있던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는 아이들마다 자두 알만큼 눈이 커졌다.
교실 뒤에 붙여 놓은 그림 때문이었다.

63장의 그림들이 담쟁이덩굴처럼
교실 뒷벽 전체를 가득가득 덮고 있었다.
그림과 그림이 손을 꼭 잡고 함께 벽을 오르고 있었다.
어깨에 어깨를 걸고 가파른 벽을 오르고 있었다.

잘 그린 그림이든, 못 그린 그림이든,
담쟁이덩굴처럼 손을 잡고 가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담쟁이덩굴처럼 어깨에 어깨를 걸고 가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하셨다.
...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건 박수 받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건 박수 치는 사람이다.

-이철환의 <<반성문>> ,랜덤코리아

 사진-최대성,2011

 

육촌형-남과 북의 비극을 풀 수 있는 실마리



-이현주,  육촌형-

양짓담과 음실은 서로 시집오고 장가가는 가족같은 동네였다. 
두 마을의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 다녔고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음실에 한산목장이 들어오고, 양짓담에는 벽돌공장이 들어온다
음실에 이사온 얼굴이 하얗고 유약해 보이는 유세아라는 아이는 홍탱크라는 가장 힘센 아이를 앞세워 반 아이들을 휘어잡는다
얼마후 양짓담에도 벽돌공장의 아들이 이사왔는데 오토바이를 타고다녀 오토바이로 불리는 아이가
같은 반이 되어 세아와 대결구도를 갖는다
힘은충돌하는 법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끝에 두 아이는 자기 마을의 아이들에게 싸움을 가르치게 되고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게 된다

'홍탱크는 음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양짓담 아이들을 데려다가 태권도를 가르쳤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오토바이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거스르기는커녕 오히려 홍탱크를 믿고 까불던 음실 놈들을 혼내 주자면서 설치는 녀석들까지 생겼다. 양짓담 아이들과 음실 아이들은 마침내 앙숙이 되었다. 이제는 학교를 오가는 길에 서로 어울려 개울에서 가재를 잡는 일이 없어졌다. 소풍을 가도 따로 놀았고 군내 초등학교 축구 시합에서도 함께 응원하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들이 꾸중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인용

 주인공 상태의 육촌형인 언청이 김 근태는  양짓담에서 음실로 이사를 갔고 친척집인 주인공의 집에 심부름을 오게 된다
 왕래를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밤에 몰래 왔는데도 왠 일인지 탄로가 나서
결국 소나무밭 싸움터에 불러나갔다.
" 야 너 우리 양짓담의 비밀을 다 고해 바쳤지? 우리가 매일 싸움 연습하는 거 일러줬지?"
"그렇다면 좋아! 네가 정말 그렇게 깨끗하다면 그걸 증명해 봐. 이따 공터로 와. 거기서 근태하고 한판 붙는 거야.
이기면 네 말을 믿어 줄 테다. 알겠어?

소나무 밭 공터에 반 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구경을 하고 있다
원하지도 않는 싸움에 둘은 설렁설렁 한 대씩 치게 되었고 점차 피를 흘리며 격하게 때리고 맞기를 계속하다가
육촌형인 근태가 " 상태야, 상태야 그만해, 상태야"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고
지켜보던 아이들도
"이제 우리도 싸움 안할거야" 하였다.



연평도 도발 사건을 보니 자꾸 속에 울화가 치민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유세아, 홍탱크, 오토바이가 밉다. 그러면 안되는데 흠씬 두들겨 패주고싶다.

 한 형제인 남과 북은 이제 만나서 화해하고 하나가 되야 한다.
근태와 상태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치 보지말고 겁먹지 말고.




시체로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 있을까?

미국의 그레그 헤로가 설립한 라이프젬사는 죽은 사람이나 동물 같은 유기체를 원료를 해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유골은 초고온의 오븐에서 흑연으로 바뀌고,
여기에 장시간 고압을  가하면 파랑과 노랑의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된다.
유골 다이아몬드는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새로운 장례 문화의 하나로 인기를 얻고있다

출처: 퀴즈! 과학상식,글송이 p103,

이 책을 본 아들 왈,
"엄마, 이거 마술 아니야?"~^^

"흐음~
그래, 하나님이 우리 뼈의 재료를 가장 귀한 것으로 만들었네~"ㅇㅅㅇ

양초와 성경

"예수를 믿어야 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어 천당 가시기 바랍니다"

  낯선 서양인이 시장거리 한복판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열심히 외친다. 그 옆에 선 중국인 통역이 떠듬떠듬 조선말로 옮기는데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래도 모여든 흰옷차림 조선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1876년 늦가을, 만주 봉천 근처 '고려문'이라 불리는 국경 지역에 있었던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선교사 로스는 중국인 통역을 두고 조선에서 왔다는 장사꾼들에게 전도하고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만만디'소극적인 중국인들과 달리 세 시간 넘게 계속된 설교였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는 조선 상인들을 보면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설교가 끝나자 조선 상인들이 우르르 로스에게 몰려들었다. 로스는 이들의 개종 결심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초점 맞추어 본 것은 로스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이었다. 중국인 통역을 통해 로스에게 전달된 요구사항.
" 이 옷감은 어데 가야 구할 수 있습네까?"

과연 장사꾼이었다. 질 좋은 영국제 옷을 끊어다 팔면 큰 이득을 볼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로스로서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클수 밖에. 그 후 몇 차례 조선 상인들을 만났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로스는 방법을 바꾸었다. 조선인들의 호기심을 끌 만한 물건을 공짜로 주면서 한문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조선인들에겐 양초가 인기 있었다.
 조선인들은 양초만 받아가고 싶었지만 성경과 같이 가져가야 한다는 조건에 마지못해 성경을 가지고 갈 수 밖에.
  그렇게 양초와 성경을 갖고 들어온 사람중에 의주 사람 백씨가 있었다. 그 역시 관심은 양초에 있었다. 한문 성경책은 요즘들어 종교에 부쩍 관심을 두고 있는 아들에게 "무슨 책인지 읽어나 보라"여 주었다. 
아들은 낯 선 책을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책에 몰입되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연배 친구들을 모아 성경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은밀히 들어온 기독교 관련 책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씨네 아들은 이 책에 담긴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한 친구 세 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봉천으로 선교사를 찾아갔다.
  마침 로스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가고 없었고, 대신 그의 매제되는 매킨타이어가 그를 맞았다.  조선에서 온 낯 선 청년은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예기치 않은 손님으로부터의 뜻밖의 요청을 받은 매킨타이어는 4개월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여러가지로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의 확신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예수를 믿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희생될 수 있다는 말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자세에 매킨타이어는 더이상 세례를 미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의 첫 열매들'의 하나인 백홍준(白鴻俊)의 세례가 이루어졌다. 그 때가 1879년. 한국 개신교 첫 세례교인이 나온 해였으니 외국인 선교사가 내한하기 5년 전이었다.
  백홍준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선교사의 제안도 뿌리치고 세례를 받자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봉천에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책으로 인쇄하는 일을 비롯하여 선교사에게 일자리를 얻어 머무는 조선인들이 십여 명있었다.  그들 중에는 교인보다는 교인이 아닌 자가 더 많았다. 대부분 '밥벌이'로 선교사와 함께 있었다. 어렵사리 '고백 교인'을 얻은 선교사로서는 그를 옆에 두고 일했으면 했다. 그러나 백홍준은 귀향길을 서둘렀다.
 
"내레 압록강을 건넌 것은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드랬는데, 이제 세례를 받았으니 돌아가는 것 뿐이외다."

  고향 의주에 돌아온 백홍준은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불러모아 보다 확실해진 기독교 진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1882년 이후 만주에서  번역 출판된 한글 성경들이 은밀히 유입되어 읽혔고 자연스레 의주에 백홍준을 중심한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백홍준은 기독교를 전하였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으나 1894년(혹은 1893년) 별세하기까지 신앙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가 이끈 의주 신앙공동체에서 후에 기독교 초석을 놓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언더우드를 도와 새문안 장로교회를 창설한 서상륜, 마펫을 도와 평양 장로교회를 개척한 한석진, 아펜젤러를 도와 정동감리교회와 의주읍 감리교회를 세운 최성균 등이 그들이다.  로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그에게 '백사도'(Paik the Disciple)란 칭호를 붙인 것은 당연하였다.

  한국 교회는 그에게서 '능동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에 의한 주체적 토착 교회 설립'의 처음 출발을 읽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양초 대신 성경에 맞추어진 그의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본문의 내용, 첫장에서 발췌함-

 신앙과 지성사에서 2009.4.10.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60가지 에피소드 속에는  민족의 상황 속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이덕주 교수의 강의는 명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글도 훌륭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강추합니다. 쉽고 재밌고 유익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편씩 읽어주려고 합니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다



책을 사둔지  한참 후에나 용감하게 책을 들었다. 
왠지 강력한 힘이 내 속에 숨어 있는 정의감에 불을 일으킬 것 같기도하고,
비겁함을 왜곡된 온유함의 가면으로 감추고 있기에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붉은 표지, 인상깊은 체(che)의 사진, 다분히 용기가 필요했다. 

그가 죽은 후 '전사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던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 차코의 작은 시골 마을의 조그만 학교에서 서른 아홉의 나이로 사살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비쩍 마른 체(che)의 모습은 그 옛날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ch',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이었다. 둘 다 평등을 위해 투쟁한 박애주의자들이었지만, 체 게바라가 선택했던 길은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예수가 걸었던 평화로운 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르헨티나의 의학도였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남미여행을 통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 판단하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참인간이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며 이것을 방해 받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다.

 체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뤘다. 그러나 그는 쿠바인으로 머물며 관료의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고
제국주의에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디든지 갔던 사람이다.
그는 쿠바, 아프리카의 콩고, 남미의 볼리비아 등의 혁명에 투신하였고  게릴라 활동을 벌이면서 그는 체로 불린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언제나 농민과 인디오와 메스티조와 함께 하는 따뜻한  인간애가 체에게 있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언제나 고민했던 , 그러나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로 다시 고민하게 된다.
영화 '미션'의 두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과 멘도자의 입장 중 여전히 한쪽을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가브리엘을 지향하면서도 멘도자를 부러워하는 어정쩡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최고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가 온전히 인간을 사랑할 수 있고 온전히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일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결혼

'사랑을 느껴야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른바 사랑을 '느끼는' 황홀한 상태는 여러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그럽고 용감해지도록 도와주며, 연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뜨게해 주고, 단순한 동물적 성욕을 억제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정욕을 이기는 위대한 정복자입니다.
사랑을 느끼는것은 고귀한 감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정에 불과합니다. 어떤 감정도 언제까지나 강렬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지속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지속될 수 있으며 원칙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간에 '사랑을 느끼는'상태 역시 대개는 지속되지 못합니다.
옛날 이야기들은 흔히 " 그후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끝나지만 만약 이말이 '50년이 지나도록 결혼하기 전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뿐 아니라 설령 그럴 수 있다하더라도 전혀 바람직한 일이 못 됩니다.
50년 동안이나 그런 설렘이나 흥분 상태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그럴 경우 일이나 취미나 잠이나 친구 관계는 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사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꼭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로 유지되며 의도적인 습관으로 강해지는 깊은 연합, 하나님의 은혜로써 강화되는 깊은 연합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C. S. 루이스 

C. S. 루이스-<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루이스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을 할것인가를 선택하거나 결정을 하는 동기는 그 사람의 도덕성이고,
도덕의 덕목은 절제, 분별력, 꿋꿋함이고 여기에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는
1891년 11월 29일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출생했으며,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25년에서 1954년까지 옥스퍼드 모들린 평의원으로 재직했고. 1954년 이후에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담당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58세에 조이 데이빗먼 그레셤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결혼이야기는 '새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예기지 못한 기쁨>,<고통의 문제>,<나니아 연대기>등이 있습니다.

수필- 피천득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우리 집 수족관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인간성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과 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어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의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뜻으로본 한국역사 - 함석헌

물론 사람은 감흥도 있어야 하고 명상도 있어야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요, 그 사실을 살로 만드는 것은 사색이다.
사실을 떠난 감흥이나 명상은 마치 붙어살이(寄生)나 화분에 심은 나무와 같다. 붙어살이는 남의 만든 것을 얻어서 사는 것이요, 화분에 심은 것은 고립한 저로만 사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어느정도 살 수있는 것이 아닌 것은 아니나, 크게는 되지 못한다.
감흥은 밖에서 오는 것이요, 명상은 내 속만 파먹는 일이다. 정말 크게, 오래 살려면 사실에다 뿌리를 박고 그것을 삭여 빨아올려야 한다.
사실은 나보다는 큰 객관적인 존재요, 나는 사실보다는 참된 주관적인 삶이다. 그 둘이 하나가 되어야 살림이다. 그것을 하는 것이 사색이다.
.............
사실은 두 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
먼젓것은 나를 나대로 완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들여다보고 깊이 파자는 것이요,
뒤엣것은 세계를 그 광대무변하고 유구무한한 변천에서 붙잡고 하나를 얻자는 것이다. 이것이 전체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라면, 저것은 나 속에서 전체를 봄이다.

역사는 과거의 죽은 깍지 혹은 무덤이 아니고 새 세계관을 지어내는 풀무다
지나간 일을 단순한 사실로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본문 중에서-

교과서에 의해 주입되던  사관이 아닌, 다른 사관으로 쓰여진 역사서를 보는 것은 편향되지 않는 지식을 갖게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독하였다.
함석헌 선생의 얼과 힘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