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우물

'때로는 시인'에 해당되는 글 17건

  1. 편지
  2. 어머니
  3. 빈 집
  4. 성장만
  5. 아, 세월호
  6. 산맥과 파도
  7. 시인 선서
  8. 스승의 날에
  9. 사랑
  10. 대강절

편지

때로는 시인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옇고(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1936. 12

어머니

때로는 시인

아프지 않다

배고프지 않다

엄마는 괜찮다

너 먹어라 굶지 말고

하시더니

 

아프다 아프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시며

얼굴을 찡그리고

투정을 하신다

 

어머니는 그 오랜 세월

어떻게

괜찮다 괜찮다

하셨을까

 

빈 집

때로는 시인

어머니 병원에 두고 잠깐 다니러 온 고향집

열려 있는 대문 안에는 반기는 목소리 없이

너덜거리고  빛바랜 나무 의자만이

거기 앉아 계시던 분들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고 기운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담장 옆 빨랫줄에 나팔꽃 덩굴이 꽃을 피워도

그 앞으로 점박이 산나리가 곱게 피어도

여기저기 거미줄이 담장을 가로막아도

 

저걸 치워야지 생각도 못하고

하루하루

겨우 겨우

아버지의 의자처럼 빛바래가고 있다.

성장만

때로는 시인

 

   성장만- 2014. 5. 18. 박유미

 

   무슨 한이 그리 많은지

   죽을 듯 죽일 듯 자라려고만 한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눕느라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봄 여름 쑥쑥 자란다.

   가을 겨울이 되어도 자라기만 한다.

   꽃밭에 봄꽃이 피고 여름 열매가 열려도

   들녘에 가을꽃이 피고 알곡이 여물어도

   겨울산 소나무 언덕굴 짐승들은 잠자도

   사람은 쉬지 않고 자라기만 한다

   남보다 더 자라려고만 한다

 

   이파리만 무성하려느냐

   꾸짖는 소리도 못 듣고.

아, 세월호

때로는 시인


 

        

 

 

 

 

 

 

                               아, 세월호    

 

                          배를 볼 때마다 기억합니다.

                         바닷물 속에 핀

                         파란 달개비꽃

                         보드라운 강아지풀

 

                         불허된 존재의 향연

 

 

                             2014. 5. 15. 박유미

       

 

산맥과 파도

때로는 시인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외설악의 저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 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도종환

시인 선서

때로는 시인

 '시인 선서'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김종해·시인, 1941-)

스승의 날에

때로는 시인

스승의 날에

 

                                                           

스승의 날 아침

초등학생 아들이  책가방을 메고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엄마 볼에 입맞추고 

상큼상큼 뛰어서 학교에 간다

 

내 아이만 잘 부탁하는 것으로 알까봐

감사의 꽃 한송이도 들려보내지 않았다

모든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할

어떤 선물도 생각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야 신난다~ 오늘은 엄마가 집에 있네

엄마! 작년 담임 선생님께 편지써서 갖다드렸어요

안에 천원 넣어서요

천원?

가짜 천원요, 내가 그린 거

오호~ 기특한 걸

그럼 지금 담임선생님은?

에이~ 엄마, 지금 선생님은 조금 더 지켜봐야죠

내년 스승의 날에 드릴 거예요

 

아들에게 한 수 배웠다.

아들의 작년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난 정말 부럽다.

 

 

 

 

 

 

사랑

때로는 시인

                           사랑

                                                      박형진

 

    풀여치 한 마리가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창작과비평사

 

 

안도현 시인은 위와 같이 큰 시를 포함해 그 크기가 만만치 않은 시들을 엮어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었다.

 

위의 시에 대한 안도현의 짧은 감상을 소개한다.

 사랑을 쓰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신물날 정도로 흔한 그리움이나 기다림 같은 개뼉다귀들을 말끔이 걷어내고 

'모든  살아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하고, 그리고 

'이 세상 속의 나를' 아는 사랑이란 얼마나 맑고 빛나는가... 후략

 

...................................

 

나를 위해 그가 있고 사물이 있고 우주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어린아이일 때다.

어린 아이를 낳아기르다 보면 너를 위해 내가 있고 너를 위해 내가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제서야 어른이 된다. 진짜 사랑을 알게된다.

풀여치가 날아와 내게 앉았을 때 나는 그를 위해 풀잎이 되는 것, 한번 풀잎이 되고나면

나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

이 세상 속의 나의 존재는 그의 것이며 온 세상의 충만한 생명들의 것,

그것임을 안다.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

네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라

-눅10:29, 36

 

  

 

대강절

때로는 시인


대강절을
기다림으로 시작합니다
내게 기다림은 거의 설렘이었습니다

또 다른 설렘으로  한해를 시작합니다
나의 시작은 달력의 첫 달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길가에서 서성거립니다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고

그러나 내게
오늘은 날들의 시작입니다

마지막을 사는 비장함과 무거움이 아니라
시작하는 설렘과 서툼,그러나 정성으로  사는 하루



나는 오늘 주님을 기다리며  다시 삽니다
다시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