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우물

양초와 성경

"예수를 믿어야 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어 천당 가시기 바랍니다"

  낯선 서양인이 시장거리 한복판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열심히 외친다. 그 옆에 선 중국인 통역이 떠듬떠듬 조선말로 옮기는데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래도 모여든 흰옷차림 조선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1876년 늦가을, 만주 봉천 근처 '고려문'이라 불리는 국경 지역에 있었던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선교사 로스는 중국인 통역을 두고 조선에서 왔다는 장사꾼들에게 전도하고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만만디'소극적인 중국인들과 달리 세 시간 넘게 계속된 설교였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는 조선 상인들을 보면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설교가 끝나자 조선 상인들이 우르르 로스에게 몰려들었다. 로스는 이들의 개종 결심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초점 맞추어 본 것은 로스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이었다. 중국인 통역을 통해 로스에게 전달된 요구사항.
" 이 옷감은 어데 가야 구할 수 있습네까?"

과연 장사꾼이었다. 질 좋은 영국제 옷을 끊어다 팔면 큰 이득을 볼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로스로서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클수 밖에. 그 후 몇 차례 조선 상인들을 만났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로스는 방법을 바꾸었다. 조선인들의 호기심을 끌 만한 물건을 공짜로 주면서 한문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조선인들에겐 양초가 인기 있었다.
 조선인들은 양초만 받아가고 싶었지만 성경과 같이 가져가야 한다는 조건에 마지못해 성경을 가지고 갈 수 밖에.
  그렇게 양초와 성경을 갖고 들어온 사람중에 의주 사람 백씨가 있었다. 그 역시 관심은 양초에 있었다. 한문 성경책은 요즘들어 종교에 부쩍 관심을 두고 있는 아들에게 "무슨 책인지 읽어나 보라"여 주었다. 
아들은 낯 선 책을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책에 몰입되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연배 친구들을 모아 성경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은밀히 들어온 기독교 관련 책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씨네 아들은 이 책에 담긴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한 친구 세 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봉천으로 선교사를 찾아갔다.
  마침 로스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가고 없었고, 대신 그의 매제되는 매킨타이어가 그를 맞았다.  조선에서 온 낯 선 청년은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예기치 않은 손님으로부터의 뜻밖의 요청을 받은 매킨타이어는 4개월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여러가지로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의 확신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예수를 믿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희생될 수 있다는 말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자세에 매킨타이어는 더이상 세례를 미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의 첫 열매들'의 하나인 백홍준(白鴻俊)의 세례가 이루어졌다. 그 때가 1879년. 한국 개신교 첫 세례교인이 나온 해였으니 외국인 선교사가 내한하기 5년 전이었다.
  백홍준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선교사의 제안도 뿌리치고 세례를 받자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봉천에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책으로 인쇄하는 일을 비롯하여 선교사에게 일자리를 얻어 머무는 조선인들이 십여 명있었다.  그들 중에는 교인보다는 교인이 아닌 자가 더 많았다. 대부분 '밥벌이'로 선교사와 함께 있었다. 어렵사리 '고백 교인'을 얻은 선교사로서는 그를 옆에 두고 일했으면 했다. 그러나 백홍준은 귀향길을 서둘렀다.
 
"내레 압록강을 건넌 것은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드랬는데, 이제 세례를 받았으니 돌아가는 것 뿐이외다."

  고향 의주에 돌아온 백홍준은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불러모아 보다 확실해진 기독교 진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1882년 이후 만주에서  번역 출판된 한글 성경들이 은밀히 유입되어 읽혔고 자연스레 의주에 백홍준을 중심한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백홍준은 기독교를 전하였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으나 1894년(혹은 1893년) 별세하기까지 신앙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가 이끈 의주 신앙공동체에서 후에 기독교 초석을 놓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언더우드를 도와 새문안 장로교회를 창설한 서상륜, 마펫을 도와 평양 장로교회를 개척한 한석진, 아펜젤러를 도와 정동감리교회와 의주읍 감리교회를 세운 최성균 등이 그들이다.  로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그에게 '백사도'(Paik the Disciple)란 칭호를 붙인 것은 당연하였다.

  한국 교회는 그에게서 '능동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에 의한 주체적 토착 교회 설립'의 처음 출발을 읽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양초 대신 성경에 맞추어진 그의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본문의 내용, 첫장에서 발췌함-

 신앙과 지성사에서 2009.4.10.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60가지 에피소드 속에는  민족의 상황 속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이덕주 교수의 강의는 명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글도 훌륭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강추합니다. 쉽고 재밌고 유익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편씩 읽어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