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우물

'때로는 시인'에 해당되는 글 17건

  1. 10월의 마지막 밤
  2. 복종
  3. 아이들이 지은 동시
  4. 나이
  5. 담쟁이-도종환
  6. 소꿉놀이
  7. 동방의 등불

10월의 마지막 밤

때로는 시인




창밖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보인다
길에서 뭔가를 팔고 있다
점퍼를 입었는데 키가커서인지 잘 어울린다
추워보인다. 입을 꽉 다물고 있는게.
막차는 출발했고 그의 슬픈 눈빛은 거기에 남아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인데 땡땡이 쳤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서있는데
바람이 자꾸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누르려고
옷깃을 여미고 두손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
겨드랑이 사이에 열장이나 넘게 쓴 편지가 있다
편지를 전해주던 그 날은
촌스럽게도 10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볏단가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웃통을 훌러덩 벗더니
빨간 나이롱 내복을 뒤적거리며 이를 잡는다.
따스한 햇살과 축 늘어진 할매젖
겨울이 아니라 봄이 올라고 했나 보다. 



가을 중에서도 끝 가을, 이렇게 추위가 시작되는 가을을 저는 몹시 탑니다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저절로 시가 써지네요
제 유년의 기억,  사춘기의 기억, 그리고 20대의 기억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시간이 쌓이듯이 글도 그렇게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아니 계절은 위에서부터 흐릅니다.
 


복종

때로는 시인
                     복종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복종할 마음없이 복종의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시대에
 한번 되새겨 볼만합니다.  
 

아이들이 지은 동시

때로는 시인

나머지
집에 가려는데
저 앞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날보고 나머지라 할까봐
아무도 모르게 좁은 길로 간다
왜 이런 좁은 길로 가야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하나
난 이제부터 누가 뭐래도
 큰 길로 가겠다


딱지치기

딱지 따먹기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감홍시

감홍시는 빨간 얼굴로 날 놀긴다
돌을 들고 딱 던지니까
던져보시롱
던져보시롱
헤헤헤 안맞았지롱
안 맞았지롱 한다
요 놈의 감홍시 두고보자
자꾸자꾸 돌팔매질을 해도
끝까지 안떨어진다

나이

때로는 시인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 것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이븐 하짐

담쟁이-도종환

때로는 시인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소꿉놀이

때로는 시인

                                       흙물숭늉 훌훌 불며 마셔요

                               댓돌위에 당신과 내 신발 나란히 놓여있고

                                    -시집<물구나무>(북인)

동방의 등불

때로는 시인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세계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타고르. <코리아 찬미>-


동양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1941)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1929), 동아일보에 게재한 송시(訟詩)입니다. 일제 식민지하에 있던 한국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하여 ‘동방의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유리알처럼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 역시 나라들의 빛이 되기를 바라서 외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사 49:6b-9)